필요에 의한 존재

Monologue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을 다니는 요즘, 나는 나의 존재 이유에 대해 생각한다. 우울한 맥락이 아닌 그저 순수한 궁금증이다. 그러나 단순한 질문에서 시작하여 명백한 답을 찾지 못한 나는, 이번 독백을 통해 내 생각을 정리하고자 한다.

우선, 존재 이유는 한 가지가 아닌 것 같다. 그 무게는 서로 다를 수 있지만 여러 가지 이유가 묶여서 다음 날 아침에도 우리가 눈을 뜨게 하는 원인이 되지 않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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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이러한 이유 중 한 가지를 최근에 본 애니메이션 “신세기 에반게리온” (1995) 과 “프리크리” (2000) 을 통해 알아보고자 한다. 도대체 왜 애니메이션에서 존재 이유를 찾냐고 묻는다면 내가 씹덕이라 어쩔 수 없다. 그냥 재미로 본 애니메이션인데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는지 나도 의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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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애니메이션을 보면 남자 주인공들이 비슷하다. “이카리 신지”와 “난다바 나오타”. 둘은 나이도 비슷하고 생긴 것도 비슷하며 심지어 성격도 비슷하다. 그러나 작품 내에서 둘의 가장 큰 공통점은 바로 타인의 목적을 위해 이용당한다는 것이다.


이 아래부터는 두 애니메이션에 대한 간접적인 스포일러가 있으니 두 애니메이션을 볼 사람들은 멈추기를 바란다. 근데 어차피 안 볼 거잖아. 그러니까 그냥 계속 읽어.


신지는 영문도 모른 채 자신을 떠나버린 아버지가 어느 날 부르더니 로봇에 타서 괴물들과 싸우라고 하고, 나오타는 자신을 오토바이로 쳐버린 생전 처음 보는 사람한테 이용당해 외계 로봇들과 싸우며 사실상 왜 싸우는지조차 영문을 모른다.

이처럼 둘은 처음에는 타인의 목적을 위한 수단이 된다면, 후에는 타인에게 필요한 존재가 된다. 신지는 인류의 구원자가 될지 파멸자가 될지 선택하게 되며, 나오타는 결국 본인이 “목적”이 된다.

그렇다면 이용되는 것과 필요한 것의 차이는 무엇일까?

그 차이는 본인의 주체성이 아닌가 싶다. 이용될 때는 본인의 의지와는 상관없다. 그러나 필요해질 때는 본인의 의지에 따라 상대방의 가려운 등을 긁어줄 수도 있고 무시할 수도 있다.

누군가에게 필요한 존재가 된다면 그것 또한 큰 존재 이유가 아닐까 싶다. 이 누군가는 부모님, 친구, 아니면 애인이 될 수도 있으며, 자신이 꼭 대단한 사람이어야 할 필요도 없다. 그들의 고통을 나눠주거나, 그들의 행복을 증폭시켜 주거나, 그들의 말을 들어주거나, 아니면 그저 옆에만 있어도 된다. 우리는 이러한 행동들을 선택할 수 있고 누군가가 억지로 시켜서 하기는 쉽지 않다. 그러니 나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찾고 그들에게 필요한 존재가 되는 것이 나의 존재 이유가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싶다.

끝으로 해당 작품들의 노래를 보여주며 퇴장하려 한다. 사실 이게 이 글의 목적이었다. 제발 애니 봐줘…

여담으로, 애니메이션에서 존재 이유를 찾는다니 참 아이러니한 것 같다. 오히려 애니메이션이야말로 한때는 나의 현실 도피처가 된 곳인데 이제는 현실의 방향성을 제시하니 말이다.

아님말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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